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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으로 떠나는 사진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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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 2006. 11. 10. 18:34

사진에 대한 생각(강운구)

서양 사진들 같은 극적이고 다이나믹한 사진들은 이 책엔 없다. 나나 대상들이 그렇지 않기때문이다. 서양 작가들이 남의 나라에 가서 더러 그리하듯이 하자면,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리해서 뭘 어쩌자고? '희생자'를 전혀 내지 않았다고는 말 못하지만, 희생당하고 사는 이들을 '사진'을 위한 또 다른 '희생자'로 만들 생각은 거의 해 본 적이 없다. 조용한 풍경과 대체로 몸놀림이 적은 사람들을 서양식 문법으로 공격했을 때, '사진'은 다이나믹하고 좋을 수도 있다. 그랬을 때, 그러나 내용은 왜곡되기가 쉽다. 시각적인 임팩트는, 그것이 강하거나 약하거나 간에, 기법이 아니라 찍힌 내용으로부터 나와야 된다. 그러나 아무리 사실이고 진실일지라도 사진들이 너무나 밋밋하여 볼 맛이 없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가 어렵다. 재미나 매력이 없는 사진들을 의무감을 가지고 보아 줄 사람은 이 세상엔 거의 없다.

나의 친구들과 이웃과,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지, 외국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었다. '사진은 국제적 시각언어'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어떤 사진들은, 그 사진 전후의 사회, 경제, 정치적인 상황, 그리고 관습이나 문화적 맥락 같은 것을 모르면 사진이 아무리 한 눈에 잘 보인다해도 그것을 정확하게 읽을 수 없다. 사진은 작가가 인식한 것 중에 어떤 것을 기록하고 확인하는 수단이며, 그것은 발표라는 과정을 거쳐서 적거나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게 된다. 사진은 사람들에게 다만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거나, 아니면 어떤 상황이나 어떤 것에 대한 판단이나 생각을 갖도록 제시할 수 있다. 아니면 설득하거나 비판할 수도 있다.

기록하는 자의 중요한 덕목인 객관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 자기의 양심과 지식과 감성을 걸고 객관으로 지향하려는 의지를 사람들은 객관이라고 할 뿐이다. 작가의 주관적(개성의 뜻으로) 객관과 대상의 사실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것이 작품이다. 아무리 냉정한 객관적인 사진이라 하더라도, 어디엔가에(관점, 해석, 그리고 편집 등) 작가 고유의 해석이 조금이라도 곁들여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작가의 작품이 아니다. 해석하는 데에는 많거나 적거나 간에 주관이 거들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에 절대 객관이 존재하며, 일정 이상의 지적 수준을 가진 작가들이 그 절대 객관을 획득할 수 있다면, 그이들이 동일한 상황에서 작업한 결과는 거의 같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한 작가와 다른 작가와의 차이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꼭같은 작가가 여럿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 작가의) 객관과 주관, 객관과 개성의 상관관계를 따지면서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지는 난감함을 경험한 적이 있다. 객관과 주관은 대상(내용)을 선택할 때뿐만 아니라 찍을 때의 기법에도 개재된다.

'결정적인 순간'은 가장 객관적인 기법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포착한 내용이라고 해서 전부 객관적인 것은 아니다. 작가의 주관과 개성이 고른 대상이기 때문이다.

'결정적 순간'만 노리다가 놓져 버리는 것들이 많다. '결정적 순간'보다는 결정적인 장면을 바랐다. '결정적인 순간'의 외마디 말고, 감히 결정적인 장면의 촉촉한 정서와 진한 서사를 한꺼번에 바랐다.

대체로 이런 생각들이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었다.

많은 것을 보았다. 나는 온 나라의 구석구석까지 다 가서 보고 싶었다. 찍는다는 것, 꼭 파인더를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땅의 고유한 삶과 풍경과 정서를 맨눈으로 보고 느끼며 알려고 했다. 구도와 초점과 노출 그리고 내면의 의미나 외면의 아름다움 또는 표상 같은 것이 전제되는 사진이라는 성가신 방편없이, 맨눈으로 바라다보고 마음속으로 새겨두려고 했다. 그래서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거나 할 때도 졸지 않고 밖을 줄곧 내다보려고 했다. 날 저물어 캄캄하게 압축된 차창으로 마을들의 흐릿한 불빛이 지나가는 것까지도 놓지지 않으려고 했다. 보지 않고, 외부를 통하지 않고, 대뜸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사진은 언제나 현재를 찍는다지만, 어떤 것이거나 저장하려고 필름에 영상을 비추는 순간에 과거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슬픈 사진'이라고 한다. 그러나 백이십오 분의 일 초나 이백오십 분의 일 초 전은, 물리적으로는 확실히 과거이지만 현실에서는 현재의 과거는 결코 아니다. 우리가 현재 하고 있는 말, 그리고 노래, 그림, 글,------들도 말하고 노래하고, 그리고 쓰면서 그것들의 앞은 과거로 함몰된다. 시간과 겨루기에서, 슬프지 않은 것은 이 세상엔 아무것도 없다.

사진은 슬프지 않다. 다만 사진에 화석 같은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것들이 슬플 따름이다.


강운구사진집 '마을 삼부작'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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